[사연을 담다] 석막리 교회의 십자가 하선국씨

 

저는 석막리 115번지에서 출생했어요. 그리고 1939년 1월 27일이 (음력으로) 태어난 날이에요. 정인석 씨 (정명석 총재의 첫째 형)하고는 중학교 때, 이희동 목사하고 나하고 3총사 형제로서 잘 지내는 그런 찰나였어요.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나가게 됐어요.

그래서 내가 사진을 하나 찍어줘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연락을 했더니 그날이 토요일인가 됐을 건데, 카메라를 메고 내가 이제 인석이 집으로 갔어요. 갔더니 가족들이 전부 보리타작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 왔다고, 이제 고등학교 가면 못 오니까 오늘 바로 찍자고 인석이한테 얘기했어요. 얘기했더니 막 세수들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인석이 방 앞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그렇게 진학 과정을 밟기 전에 그걸 찍어서 해드리고 그렇게 하고 간 거예요.

 

 

내가 군대를 다녀와서도 진산에 사진관을 차렸었어요. 한번은 밖에 나와 보니까 누가 차에서 뭘 내리더니 뭔가를 이렇게 끌고 오더라고. 보니깐 정명석 목사예요.

“그게 뭐냐?”

“형님! 지금 금산에 가서 십자가를 맞춰 갖고 왔어요.”

그 십자가를 (석막)교회 위에 설치해야 하잖아요. 진산에서는 못 만드니까 금산 가서 맞춰서 그것을 차에서 내렸어요. 내렸는데 십자가가 길잖아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 키가 작으니까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들덕들덕들덕….’ 하면서 석막교회 쪽으로 넘어간 거예요.

정명석 목사가 새로 만들어 온 그 십자가를 메고 석막리 가는 길로 넘어갔다니까요. 금산에서 그걸 맞춰 와서… 앞섭골로 넘어간 거예요. 그렇게 월명동 사람들이 석막 교회를 힘들여서 지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하여튼 내가 지금 생각나는 것은 정명석 목사가 그 십자가를 지고서 넘어갔을 때 십자가가 자기 몸보다 크니까 이것을 메고서 ‘들덕들덕….’ 키가 작으니까 그 고생을 하면서 넘어가는 것이 지금도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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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real story [07. 사람은 기대에 기대어 산다. ]

처음 교회에 간 것은 1998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언니를 따라 한두 번 다녀갔었다. 그러다가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일진’에 가입했고, 싸움도 자주 했다. 매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남자아이들과 새벽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몇 번이나 경찰서로 잡혀갔었다. 훈방 조치되었지만 중학교 3년 기간은 흔히 말하는 ‘문제아의 삶’이었다. 학교에서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친구가 있으면 화장실에서 5~6명이 함께 폭행을 했다. 어떤 친구는 고막이 손상되어 고막 재생수술을 해 주기도 했다. 폭행으로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쓰고, 의무 봉사활동도 했었다. 학교에서 수차례 흡연한 것이 걸려 청소년 지도소에서 금연 교육도 받았다.학교 선생님들과 가족, 모든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내놓은 아이로 여겼다. 학교에서도 한 번 불량학생으로 인식이 되고 나니, 무슨 일만 터지면 주동자로 지목되곤 했다. 더 독기어린 눈빛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세상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친언니의 기도와 권유로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처음엔 교회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했었지만, 교회에 다닐수록 내가오해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고, 성경말씀을 들으면서, 중학교 시절을 반성하고 잘못된 것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에 변화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전 친구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을 끊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총회장 목사님이 수차례의 편지를 써 주시고, 전화로 기도도 해주시면서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을 믿을 때 인생 근본 문제가 해결된단다. 하나님이 늘 옆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살아라.”하시며, 고민하고 방황하던 내 마음을 붙잡아 주셨다.생활은 조금씩 변화되었다.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생활을 충실히 하니 성적도 반에서 10등 안으로 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학교 행사 대표로 뽑히는가 하면, 반 회장도 했다. 처음에는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시던 부모님도 변화된 내 모습에 총회장 목사님께 진심으로 고마워하셨다.

 

대학 진학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총회장 목사님은 성악을 해보라고 권해 주셨다. 수능 3개월을 앞두고 교회에서 성악을 전공하시는 분에게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음악 예술분야는 벼락치기가불가능하다. 최소 1년 이상은 배워야 기본을 갖출 수 있으니 서울에 있는 2년제 대학도 합격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레슨을 받았고, 열심히 연습했다.어렵고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능 성적을 받았고, ○○여대 음대 실기시험에서는 1등을 했다. ‘사람은 기대에 기대어 산다.’는 총회장 목사님의 잠언이 있다. 사람은 ‘기대’라는 관심과 사랑으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한때, 하나님과 교회, 총회장 목사님을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던 10대 성장통을 총회장 목사님이 낫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셨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언제라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다. 내가 무엇으로 청소년 시절의 탈선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한 소녀가 무엇 때문에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자신감 넘치고 희망에 찬 미래를 꿈꿀 수 있게 이끌어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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